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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고신, 빼앗긴 고신
  • 편집국
  • 등록 2021-09-13 21: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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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고신 빼앗긴 고신 - 정태홍 목사 

 

목 차 


Ⅰ. 고신의 정체성 

1. 고신교단의 정체성 

2. 참된 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3.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이후 박윤선 교장 시대

4. 삼 박사 시대 :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5. 고신신학의 과제는? 

 

Ⅱ.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위협한 사례들 

1. 현용수 박사의 쉐마교육 

2. 황희상과 특강 소요리문답 

 

Ⅲ.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1. 신론의 변화 

2. 천안 이전 이후의 고신교단 

3. 시대의 변화에 대한 대응 

4. 교회 부흥만 된다면? 

 

Ⅳ.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관상 기도가들 

1. 정현구 목사와 관상기도 

2. 김순성 교수와 관상기도 

3. 강영안 교수와 관상기도

 

Ⅴ. 고신총회가 주관하는 「북(book)덕방」 문제 

1. 인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2) 교양이라는 것이 기독교를 대적하는 것인가? 

3) 목회자들이 인문학적 이해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가? 

4) 종교개혁자들이 인문학자인가? 

5) 자녀들을 세상 학교에 보내면 안 되고 

 동화나 문학책을 읽혀서도 안 되는가? 

6) 인문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다? 

7) 인문학을 반대하는 것은 편협적이다? 

2. 「북(book)덕방」기사 자료에 대한 비평 

1)‘목회자는 교양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읽는다는 것』 강영안 교수(칼빈신학대학원) 

3)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4) ‘용서가 가능한가?’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5)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안정진 목사(서초동교회) 

6) 서양 문명이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안정진 목사(서초동교회) 

7) ‘북(book)덕방’은 목회자에게 좋은 책 발굴하는 열쇠 될 것

 

Ⅵ. 고신총회 70주년 컨퍼런스: 1차 컨퍼런스 ‘포스트 코로나와 하나님의 창조’

1. 빅뱅 천문학과 하나님의 창조 –성영은 교수(서울대)

2. 현대 생물학과 하나님의 창조 –박치욱 교수(퍼듀대학)

 

Ⅶ. 결론 

 



Ⅰ. 고신교단의 정체성 


고신교단의 목회자와 성도로서 우리의 목회와 삶을 지배하는 것인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과 교리다. 고신교단은 성경과 교리에 기반하며, 개혁신학에 근거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고신신학은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가 지키고 가르친 장로교 정통신학을 계승한다. 장로교 정통신학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신은 인문학과 영성에 눈이 멀었다. 고신은 인문학과 영성에 빼앗겼다. 

 

1. 고신교단의 정체성 


허순길 교수는 고려신학대학원 70년 역사 회고와 기대에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는 말씀으로 고려신학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지금 고신교단은 어떤 상태인가? 고신교단은 미래가 있는가? 우리는 먼저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허순길 교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신신학은 신학과 신앙, 생활의 조화를 강조했다. 신학이 없는 신학은 사변에 지나지 않고, 생활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 정통신학의 터 위에 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순수한 신앙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충성스런 생활을 해 왔었다. 박해가 왔을 때에 이듬의 신학과 신앙의 실상이 순교적 생활로 승화되어 나타났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을 받은 자들은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이교의 요구를 쉽게 수용하는 생활의 양태를 보였었다. 일체의 신사참배 압력을 받게 되었을 때 이들은 쉽게 양보하고 변절하게 된 것이다. 

 

허순길 교수에 의하면, 고신의 정체성은 첫 번째로, 성경무오, 두 번째로, 신학과 신앙과 생활의 조화에 있다. 허순길 교수는 이것을 ‘산신학’(Living Theology)이라고 말했다. 고신교단은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교의 신사참배 압력에 굴하지 않고 순교적 생활로 신앙을 지켰다. 고신교단은 자유주의 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 번째로, 허순길 교수는 이런 고신의 신학은 참교회(A true Church) 건설에 봉사하는 신학이라고 말했다. 

허순길 교수는 고신신학은 1) 장로교 정통신학 2) 신학과 신앙생활의 일치 3) 참 교회 건설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려신학교는 4) 참된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허순길 교수는 “박윤선 교장은 종전의 보수신학보다 진전된 칼빈주의 신학으로 고신신학을 정립하고 이끌어 갔다.”고 말했다.

 

2. 참된 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고신교단은 개혁신학, 곧 참된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참된 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이며, 1) 올바른 말씀 선포, 2) 바른 성례 집행 3) 권징을 성실히 수행함이다. 

칼빈주의 신학이라 함은 「도르트 신경」이 말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인 ‘TULIP’에 있다. 

 

T - Total depravity (전적타락) 

U -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 -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 

I -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P - Perseverance in the faith (성도의 견인) 

 

고신교단은 이것을 총회 헌법에 명시했다. 

 

고신총회 헌법전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공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전수받아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잘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하셨기에, 우리는 고신교회의 신앙고백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헌법전문에서 밝힌다. 

 

총회 헌법은, 첫 번째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으로 계시하심을 믿으며, 로마 가톨릭에서 개혁된 교회인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했다. 허순길 교수는 이런 신앙고백이 체계화된 것은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고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서」라고 말했다. 

 

3.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이후 박윤선 교장 시대


허순길 교수는 “고려신학 주남선 한상동의 산 보수신학의 터 위에 박윤선 교장의 안목 있는 칼빈주의 신학으로 건조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윤선 교장은 1929년에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을 계승하여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1934-1936)했으며, 그레샘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1881-1937) 박사로부터 지도를 받고 Th. M. 학위를 취득했으며, 1938-1940년 동안에 코넬리우스 반틸 문하에서 공부했다. 1953년-1954년에는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신약학을 연구했다. 

허순길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신학적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신념이 언제나 강하게 나타난데 있다. 그는 성경의 내용을 겸손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반틸이 말한대로 언제나 초자연주의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인간의 주관적인 사색이나, 신비적 체험을 크게 경계했다. 그는 강의시간마다 타율주의, 계시의존 사색을 수없이 강조했다. 

 

박윤선 교수는 개혁신학의 기본을 고수했다. 박윤선 박사는 신비주의, 은사주의 비판하였으나, 방언을 인정하고 허용했다. 박윤선 박사는 불건전한 신비주의 사상이 왕성하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인정함으로써 그런 비판에 대한 논지가 흐려졌다. 

박윤선 박사는 사도행전 2장 1-4절을 주석하면서 방언과 관련하여 2가지를 말했다. 첫째, 오늘날 방언이 존재하며, 둘째,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르다고 말했다. 물론 박윤선 박사는 현대의 방언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언을 허용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현대 방언과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교회 시대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역시 표준적인 이적을 행한다면, 그들도 또한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 있는 계시도 받는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과 성경만 기초로 한 기독교의 신앙 성격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참된 방언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을, 사도들의 사역으로 나타났던 초대교회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 운동에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되며, 방언을 위주하지 않아야 한다. 

 

박윤선 박사는 현대의 방언이 계시적 성경을 띠거나 초대교회의 방언과 수준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언을 “유익”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신비주의, 은사주의와 경계가 느슨해졌다. 

최윤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 시대에 방언이 있을 수 없다는 학설에 대하여, 박윤선은 신약에 기록된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며(행2:4; 10:45-46; 19:6; 고전12:10), 교회 시대에 나타난 방언들 중에 거짓된 것들도 있지만, 성령의 역사로 된 참된 방언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면서, 이것은 아직도 논쟁의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목회상담적 측면에서 목회자들은 참 방언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4장에 위반되지 않도록 권면할 것을 박윤선은 답변한다. 특히 그는 고린도전서 14:6-40절을 주석하면서 방언사용의 원리에 대하여 7가지를 제시한다. 

 

박윤선 박사는 부패한 교회에 대한 해결책으로 첫째로 개혁, 둘째로 바른 목회자의 양성이라고 말했다. 박윤선 박사는 “말씀 최우선, 말씀 절대 신뢰”을 주창했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는 “성령의 역사로 된 참된 방언”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박윤선 박사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개혁신학의 정통성에 균열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4. 삼 박사 시대 :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소위 삼 박사가 구미에서 연구하고 교단에 돌아와서 1960-80년대까지 대략 30년 동안 고려파 신학에 봉사했다. 허순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분은 박윤선 교장의 제자로서 신학의 기본교육을 그로부터 받았고 신학의 터를 다졌었다. 박윤선 이후 고신의 신학은 실제로 그의 신학의 체계와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고 보게 된다. 

 

허순길 교수에 의하면, 삼 박사는 박윤선 박사의 신학 체계와 범위를 넘지 못했다. 고신교단은 승동과의 통합 외에 불미스런 사건들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5. 고신신학의 과제는? 


허순길 교수는 “앞으로 고신은 한국에서 명실공히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간성이 되어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성을 드러낼 책임이 있다”면서, 고신 신학의 과제는 4가지로 말했다. 

 

1. 개혁신학의 탁월성을 드러내야 한다. 

2. 개혁주의 신앙의 생활화를 이룩해야 한다. 

3. 교회 지도자의 임의적인 결단과 전횡이 그쳐야 한다. 

4. 개혁주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여 생활에 적용하여야 한다. 

 

허순길 교수는 개혁신학의 심처를 파고들어 그 심오성과 탁월성을 드러내야 하며, 개혁주의 모토가 구호로만 머물지 않고 신앙이 생활화되어야 하며, 지도자들이 회중의 뜻을 살피고 치리회를 존중해야 하며, 개혁주의 생활의 원리를 계속 연구 개발하여 교회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신교단의 목사와 성도는 개혁신학을 더 연구하여 개혁신학을 삶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원리가 성경을 근간으로 하고 개혁신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성경과 개혁신학을 벗어나지 않도록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코로나 시대에 고신교단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순종하여 영광을 돌려야 한다. 

 

Ⅱ.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위협한 사례들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실제적인 사례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근래까지 일어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비성경적인 쉐마교육 


안병만 목사는 현용수 박사의 ‘쉐마인성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용수 박사의 ‘쉐마인성교육’은 지극히 비성경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과 교리에 위배 되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현용수 박사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여러분 이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가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구랍니다. 잠언에서 개미에게 배우라는 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거기 있습니까? 겸손하라. 거의 다 교육입니다. 선민교육입니다.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요. 그 외의 책들에는 그게 아닙니다. 왜 성경에는 뭐가 있으니까? 성화의 과정, 교육도 있고 엄청나게 많아요. 교육에 관한 것들이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까 우리를, 구약은 거의가 교육학적인 거에요. 물론 창세기 3장 15절에 원시 복음 같은게 있긴 있습니다. 그런 거 제외하고는 전부가 선민교육입니다. 이런 것들이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거의 없습니다.

 

다른 얘기하지 마세요. 저는요 다니다 보면 벼라별 얘기 다 듣습니다. 한국의 박윤선 박사님이래든가 한경직 목사이라든자 박형룡 박사님이라든가 이런 분들이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었기 땜에 성인처럼 그렇게 인격적이었습니까? 노!! 그분들은 예수님 믿기 이전에 한학을 공부했어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단 말이이에요. 한학. 그러니까 몸 가짐이 항상 얌전한거에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무게가 있는거에요. 인격적이에요. 총신대 출신이라면, 여러분들 그분들한테 감화를 받은게, 그분이 강의를 잘 한 것도 있습니다만, 내용도 충실합니다만, 뭐에 대해서 인격을 받았느냐? 뭐에 대해서 그분들이 충격을 받았느냐? 그분들의 인격입니다.

여러분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 학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요. 서울에 올라왔고 이 저 배재학교 거기서 선교사한테 에 그 이 저 성경공부 하고, 고 다음에 미국에 샌프란시스코 가서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다닌에 학벌이 전체 다라니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모든 한국 민족의 그 이 그 지도자의 반열의 1위에 오른 게 뭔 줄 압니까? 17살까지 서당교육을 받은 거 서당교육, 서당교육을 받았단 말이에요 서당교육.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구약 지상명령을 실천한 결과: 예수님이 오심


구약의 지상명령을 처음 받은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를 통해 오직 하나뿐인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과 믿음을 잘 가르쳐 전수했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대로 그의 아들 야곱에게 똑같이 말씀과 믿음을 잘 가르쳐 전수했다. 야곱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말씀과 믿음을 잘 가르쳐 전수했다. 이와같이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 3대가 세대 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전수하여 구약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11장까지의 말씀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수집하여 이삭에게 전수했는데, 이삭은 이것을 야곱에게 전수하고, 야곱은 또 이것을 자신의 열두 아들들에게 전수했고, 그다음 세대들도 또 그 다음 세대들에게 꼭 같은 내용을 전수했다. 아브라함부터 650년 후 모세는 이렇게 전해 받은 정보를 가지고 창세기를 기록했다.

만약 중간에 어느 한 세대라도 이 말씀들을 바르게 전수하지 못하여 어떤 부분이 상실, 왜곡, 변조, 첨삭되었다면 어떻게 모세가 창세기를 쓸 수 있었겠는가? 이 창세기를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족보를 따라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어떻게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정확 무오한 성경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진행될 수 있겠는가?

모세 이후에도 1,400여 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계속 부모가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3대 가정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지켜 행하는 구약의 지상명령을 실천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약성경을 한 세대도 거르지 않고 자손 대대로 전수하여 신약시대 기독교인들의 손에까지 전수하는 데 성공했다.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으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토라(구약의 율법)에 정통하셨다.

 

문제는 뭡니까? 예수님 믿기 이전에 13세 이전에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양반 교인이 되느냐 쌍놈 교인 되느냐? 구별이 되는 겁니다. 

 

현용수 박사의 이런 사상은 지극히 비성경적이며 고신교단이 표방하는 칼빈주의 개혁신학과 극명하게 다른 것이다. 현용수 박사는 쉐마인성교육에 대한 공개토론을 거부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세상 법정에 수차례 고소했다. 인성교육이라 말하면서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지적하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 인성교육인가? 

그런데도 안병만 목사는 현용수 박사의 쉐마인성교육을 적극 옹호하며 책을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총회 재판부를 열어 정태홍 목사의 목사직을 어떻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코람데오 닷컴에 게재된 안병만 목사와 김대진 목사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안병만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에서 진성택 씨, 정태홍 목사 그리고 김반석 목사의 가정 목회와 교회목회 현장도 취재해 쉐마 목회하시는 분들과 대조를 하여, 많은 이들에게 왜 그들이 틀리고 쉐마교육이 옳은지를 그 열매로 밝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책상에 앉아서 사변적인 논리와 도그마로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다음 세대 교육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극히 성경적인 옳은 길, 소망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아 소망이 없는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이들입니다. 

 

안병만 목사는 정태홍 목사를 비롯한 쉐마인성교육의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대해,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를 언급하면서, “1) 신학적으로 무식하거나, 2) 율법주의자 내지는 성경의 문자주의에 함몰된, 이단보다 더 무서운 교리주의자들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누가 신학적으로 무식하고 과연 누가 이단보다 더 무서운 교리주의자들인가? 쉐마인성교육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 인성교육이고 성경적인 교육인가? ‘나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세상 법정에 고소해야 한다’는 것이 쉐마인성교육의 실체인가? 안병만 목사는 “교육은 이론에 따른 열매가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인가? 

 

 2. 황희상과 특강 소요리문답 


황희상은 『특강소요리 문답』을 출판했으며, 고려신학대학원 계절학기에 신학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가르쳤다. 코람데오 닷컴은 황희상에 대한 기사를 연재했다. 손재익 목사는 ‘전국 SFC 제16차 리더십 컨퍼런스’ 강사를 말하면서, “황희상 교수”라고 말했다. 

황희상의 『특강소요리 문답』에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담임), 신원하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안명준 교수(평택대학교 조직신학), 유태화 교수(백석대학교 조직신학), 유해무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이성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황대우 교수(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가 추천서를 썼다. 

황희상의 『특강소요리 문답』은 무엇이 문제인가? 황희상이 말하는 교리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황희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용주의적 생각으로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법입니다. 그 분명한 기준 앞에서 선의의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어떤 거짓말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황희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법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법”이라고 말했다. 황희상은 “선의의 거짓말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거짓말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도덕법의 엄중함을 말했다. 

황희상의 논리에 의하면, 어떤 거짓말도 허용이 안 되며 어떤 도둑질도 용납이 될 수 없다. 도둑질에 대해 황희상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황희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장발장처럼 배가 고픈 극단의 상황에서 사소한 것을 훔치는 행위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단순히 ‘욕심으로 남의 것을 훔친 것’이라고 매도하기는 너무 냉정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욕심과 생존본능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 역시 사회적 관점에서 봐줘야 될 것입니다. 즉, 그러한 사람이 사회 공동체 속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회는 불의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되, 그 사람을 배려하고,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그 사회를 개혁하는 데 집중해야 될 것입니다(분배 정의의 문제). 그밖에도 집단이기주의, 불공정거래, 종교인 치부문제, 정치인의 청렴도 문제, 원료자원 무기화, 식량 무기화, 지구온난화와 도쿄 의정서 등, 8계명을 통해 생각할 거리가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거짓말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면서, 도둑질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게 “사회적 관점에서 봐줘야”할 문제로 말하는가? 이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도둑질은 분명히 성경에서 죄라고 말한다. 죄를 “사회적 관점에서 봐줘야”한다고 말하면서 “분배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교리교육을 바르게 하려면 성경적 관점이 사회적 관점보다 앞서야 한다. 

 

황희상은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에서 ‘양심수나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나아가, 언제나 진실이 드러나고 보장받을 수 있도록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조건 없이 보장받아야 하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헌법 제12조 4항), 묵비권(헌법 제12조 2항), 형사 피고인의 무죄 추정 원칙(헌법 제27조 4항) 등이 언제 어디서나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양심수나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에서 고려할 사항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환경을 위해 법과 제도를 항상 새롭게 정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황희상은 “양심수나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문제를 말했다. 황희상은 간첩 서준식의 인권에 대해 말했다. 서준식은 양심수다. 황희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권 운동가 서준식 씨 구속과 무죄 석방 운동

“국민의 인권을 무시하는 정부는 정부가 아닙니다.” 이 단정적인 어조의 한 줄 짜리 명제는 세계 최대의 인권운동단체인 국제 엠네스티(국제 사면 위원회, 한국 지부장 허창수)가 제작한 선전물에 담긴 문구이다. 국제 엠네스티는 양심수 석방, 고문 폐지, 정치적 살해 등 각종 인권 침해 행위의 종식을 위해 활동하여 세계 평화와 인권 보호에 기여한 바가 커, 국제적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 단체이다. 

 

인권운동가의 구속과 불복종 운동

지난 11월 4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제2회 인권영화제를 기획한 서준식(49,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서 씨가 인권영화제를 통해 이적성이 있는 영화 <레드 헌트>(감독 조성봉, 83분)를 상영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 영화는 제주 4·3항쟁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올해 초에 열린 지난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외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영화를 '이적 표현물'로 규정했고, 서 씨에게는 결국 정식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국제 엠네스티는 서 씨가 체포된 지 3시간 만에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양심수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한국민이 있다면 멀리 볼 것 없이 서준식 대표를 보면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13일 발족된 ‘인권운동가 서준식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공동대표 김승훈)’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함께 전국 대학, 교회, 성당 등지에서 <레드 헌트>를 동시 상영하기로 했다. 이들은 당국의 처사가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동시에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고 불복종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이 운동에는 제2회 인권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들의 작품설명회와 함께, 서 씨와 같은 처지의 900여 양심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도 포함된다.

공대위가 당국의 입장에 이렇듯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이유는, ‘서 씨의 구속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민 모두의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회장 최영도)’은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서 씨 사건을 계기로 삼아 국가보안법, 공연법, 보안관찰법 등의 위헌성을 집중 각 지역에서 열리는 인권영화제를 부각시킬 계획이다. 이 모임의 이석태 변호사는 “기본권을 제약하는 법률들이 국제 인권조약에 비추어 합당한 것인지 규명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땅에 양심은 죽었다?! 

서 씨의 구속이 인권 문제와 맞물려 그 의미가 점차 확대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14일 오전 신한국당과 국민신당 당사 앞에서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주관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참여한 이색 장례식이 열렸다. ‘이 땅에 양심이 죽었다’는 의미에서의 ‘양심 장례식’이 그것이다. 이는 서 씨의 구속과는 별도로, 최근 양심수 사면에 관한 논의들이 일어나면서 검찰이 이 땅에 ‘양심수는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 인권단체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잠시 국제 엠네스티의 권위를 빌어 양심수를 정의하면, 양심수란 ‘폭력을 행사하거나 옹호함이 없이 정치적·종교적 또는 그 밖의 양심에 입각한 신념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에 위배되는 투옥·구금·육체적 억압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구속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양심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당국의 태도에 인권단체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이날 침묵 시위에는 ‘이 땅의 비양심에 분노한다’라는 큰 주제가 내 걸렸다. 이날 시위 겸 행사를 통해 민가협은 ‘한국에 양심수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 수는 김영삼 정권 이후만도 800명에 달한다’고 설명하고, ‘구미 유학생 간첩 사건부터 최근 구속된 서 씨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부당하게 박해받고 있는 양심수들을 하루 빨리 전원 사면하라’고 주장했다.

 

보다 확대된 ‘인권’의 의미로

사회적 지위나 능력이 이미 우상이 된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어디까지 존중될 수 있는가. 강신석(광주 인권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 씨는 영화제 개최 인사말을 통해 ‘인권을 우선시하는 사회를 생각한다’고 하였다. 강씨가 바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말을 바꾸면 ‘헌법이 지켜지는 사회’를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적영화 <레드헌트>. 그러나 심판은 관객이?

그래서일까. 영화 <레드 헌터>는 제주 부녀자들의 구슬픈 <이어도> 민요 노랫가락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감독 조성봉 씨는 지난 15일, 공대위의 입장에 따라 인권영화제를 개최한 광주 남동성당에 방문하여 관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무엇이 인권을 우선시하는 것인지 딱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인간 그 자체이기에 부여받은 고유한 자격과 가치를 인권이라 부르는 것이며, 또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라며 최근의 답답한 심경을 간접적으로 토로하였다. 

국제인권선언에는, “어느 누구도 독단적으로 체포, 격리되거나 추방당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조항이 담겨있다. 그러나 ‘인권’의 의미는 여전히 국가마다 추상적이다. 이는 종종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을 이중 기준에 따라 적용시키는 현실’에 대한 변명이 된다. 

인권이라는 문제를 고문 금지·양심수 석방과 같이 항상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 그러나 언젠가 인권이라는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인 영역에서 폭넓게 이해되는 날이 오기를, ‘구속을 각오하고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이들 인권 운동가들은 한결같이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간첩 서준식의 인권을 말한 황희상의 이 글은 아직도 게재되어 있다(2021년 3월 10일 현재). 오마이뉴스에서는 서준식을 “자생적 공산주의”라고 말했으며, 글을 쓴 기자는 “나는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한 적이 없는’ 서준식을 여전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간첩 서준식의 인권을 말한다면, 저 북한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동포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고, 종교개혁을 말하면서 ‘자생적 공산주의자’인 간첩 서준식의 인권을 말하는 것이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고신교단의 정체성에 맞는 것인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황희상이 신학생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황희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교리를 가르치면 비판력이 높아집니다. 교리는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구절을 그저 모아놓은 것이 교리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 구조화, 체계화 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를 배우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리학습이 됩니다. 체계를 잡고 나면, 체계에서 벗어나거나 체계가 없는 것의 허술함이 딱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비판적이 됩니다. 이것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올바로 넘기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좋은 칼을 적절한 도구로 쓰지 못하고 강도짓에 쓰는 것처럼, 교리를 사용하는 자의 인격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비판의 칼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 요즘 교리 배우더니 왜 저렇게 날카로워졌어?”라는 말을 들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일 뿐입니다. 

 

황희상은 교리교육이 교회에 실제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좋은 칼을 적절한 도구로 쓰지 못하고 강도짓에 쓰는 것처럼, 교리를 사용하는 자의 인격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교리교육을 말하면서 공산주의를 포기한 적이 없는 서준식의 인권을 말하는 것은 좋은 칼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서준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자본주의 구조가 악의 구조라고 생각한다. 이 구조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을 한다. 자유와 평등의 참뜻이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올바르게 구현된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언제 어떤 형태로 사회주의가 구현될지 모르지만, ‘사회주의는 나쁘다’고만 말하지 말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제가 없는 사회주의를 만들자. 

 

서준식은 자기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존립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이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개혁신학이 바라는 세상은 서준식이 원하는 사회주의와 같은 것인가? 

고신교단은 개혁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개혁신학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사회주의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황희상이 교리교육을 말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에 대해 고신교단은 총회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과연 이런 처사가 개혁신학을 기치로 하는 고신교단의 정체성에 합당한 것인가? 

 

Ⅲ.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성경과 교리교육에 실패한 것은 아닌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허순길 교수가 우려했듯이 개혁신학을 삶으로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고신교단은‘지금 우리 시대는 성경과 교리가 현실의 삶에서 어느 정도로 의미가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상태가 되었다, 

변화를 알아차리고 대비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의 책임이다. 변화를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 성경으로 말하고 그 성경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체계화한 칼빈주의 신학, 개혁신학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고신의 정체성에 맞다. 이것을 고수하지 않을 거면 고신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제 변질이 일어나고 있다. 

 

1. 신론의 변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론의 변화’다. 근래에 출간된 책 중에는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wholly other)혹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말한다. 신론의 변화는 칼빈이 말하는 ‘경건’이 아니라 ‘영성’으로 간다. 그 방식이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다. 그 배경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정통주의와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의 실존주의 신학이 있다. 

세상을 이해하고 성경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이런 방식은 이미 틸리히가 이미 실험했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틸리히는 선불교로 갔다. 틸리히는 상관관계 방식을 주장했다. 

 

신학의 인식관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의 근거의 실존적이며 초월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어떤 방법도 이것이 적용되는 대상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이 없다면 전개될 수 없는 것이다. 조직신학에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조직신학의 방법은 앞으로 이 방법에 의해서 세워질 체계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나의 조직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조직신학은 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항상 의식적으로 상관관계의 방법을 사용해왔다. 특히 조직신학은 변증적인 관점이 지배적인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의 상관관계의 방법은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 의존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려는 방법이다. 

 

틸리히의 상관관계 방식은 근본적으로 신론과 인간론의 변질에 있다. 틸리히는 인간 안에 무한성을 가진 존재로 보고 신을 ‘궁극적 실재’라고 말했다. 틸리히는 “신학의 대상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다”라고 말했다. 틸리히의 신은 개혁신학이 믿고 고백하는 살아계시고 영원하며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에게 존재를 주는 존재의 힘”이다. 그런 까닭에, 임형모는 “틸리히의 하나님 개념은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반드시 궁극적인 의미의 ‘존재 자체,’‘존재의 힘,’‘비존재에 대항하는 힘,’‘무한한 존재의 힘’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틸리히는 인간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존재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존재의 용기란 무엇일까?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존재의 용기를 위한 궁극적인 원천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이다. 이것은 유신론을 초월해야 한다는 우리 요구의 결과이다. 유신론의 하나님을 초월할 때만 의심과 무의미함의 불안은 존재의 용기 속으로 이끌려 올 수 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무의미함의 불안을 떠맡는 존재의 용기는 존재의 용기가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경계 지점이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은 그저 비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형태의 용기는 그 경계선 안에서 유신론의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회복된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틸리히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는가? ‘인간의 무의미함이 주는 불안을 이기기 위한 존재의 용기는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의 힘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어떻게 했을까? 기독교를 버리고 선불교로 갔다. 틸리히가 왜 그런 길로 갔을까? 인간 안에서 “신성한 자기”(divine self)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말해주어도 ‘우리 교회는 안 그럽니다’라고 말한다. 선불교로 가기 전 단계가 관상큐티, 관상기도다. 지금 강영안 교수가 『읽는다는 것』에서 렉시오 디비나, 관상기도를 말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2. 천안 이전 이후의 고신교단 


고려신학대학원이 부산 송도 시대를 지나 천안으로 이전했다(1998년 9월 4일). ‘천안 시대 이후로 고신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북(book)덕방」과 고신총회 70주년 컨퍼런스를 통해 말하는 ‘인문학’,‘관상기도’, ‘과학이론’등을 비롯한 관점들이 ‘고신의 정체성과 과연 일치하는가?’를 진지하게 판단해야 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것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 것을 버리고 우리를 지켜갈 수 있는가? 인문학과 관상기도로 20-30세대를 품어가는 것이 교양인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인문학과 관상기도를 말하는 것은 영성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3. 시대의 변화에 대한 대응 


「북(book)덕방」과 고신총회 70주년 컨퍼런스를 통해 고신교단은 시대의 변화에 올바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인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인문학과 관상기도인가? 인문학과 관상기도에 기웃거리는 결과는 실존적 도약과 선불교로 간다. 이것은 결과 ‘좁은 시야’, ‘근본주의적 판단’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반드시 도약을 감행한다. 관상기도를 가르친 사람들은 불교와 선불교와 혼합이 되었다. 

 

4. 교회 부흥만 된다면? 


개혁주의 고신교단이라고 말하지만, 교회 부흥만 된다면 무엇이든 합리화해 오지 않았는가? 교단의 신학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교회 안에 가져와서 교회를 성장시킨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인가? 

 

Ⅳ.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관상 기도가들 

 

고신교단의 현안들을 생각할 때, 관상기도가 교단 안에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교단 내에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사람은 정현구 목사(영동교회), 김순성 교수(전 고려신학대학원장), 강영안 장로(칼빈신학대학원)다. 

 

1. 정현구 목사와 관상기도 


고려신학대학원 둘째 날 개강집회 때 정현구 목사(영동교회)가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해 말했다. 정현구 목사는 48분 21초부터 유기성 목사의 『예수 동행일기』를 말했다. 유기성 목사가 ‘프랭크 루박’(Frank C. Laubach, 1884-1970)의 『하나님의 임재체험』 책을 읽고 ‘영성일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현구 목사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나는 실제로 함께 있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말씀인데 현실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서, ‘교리가 왜 경험이 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다가, ‘한번 연습해보자 그분이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 루박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며, 그것을 일기로 썼고,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체험이라는 책이라고 말했다. 

 

『프랭크 루박의 편지』는 1930년 1월 3일부터 1932년 1월 2일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루박이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 쉬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유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매인 종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고 싶어 갈망했다.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그분만을 즐거워하는 사랑과 기쁨의 교제의 대상으로 지음받은 원형의 모습으로 누리려고 했다.

 

루박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첫째,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 둘째, 강력한 중보기도의 실험(하나님이 뜻을 이루시는데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체험). 셋째는 모로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프랭크 루박은 로마 가톨릭 수사인 로렌스 형제의 책, 『하나님의 임재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루박은 로렌스와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루박은 “인간종교의 보편성”(A university man’s religion)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어느 종교나 상관이 없이 인간 안에는 신성이 있고 그 신성이 외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영적인 성장이라는 뜻이다. 

관상 사제인 켄 카이쉬(Ken Kaisch)는 학생들에게 로렌스 형제의 글들에 나오는 기도 방법을 가르치면서 ‘임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점점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완만한, 떨리는, 깊은 에너지가 당신을 에워싸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 이 에너지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라. 이것이 우리 주의 임재다 … 이 임재 안에 잇대어 거할 때, 강도가 더 세진다. 이 경험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하다. 

 

카이쉬가 말하는 로렌스의 임재는 성경이 말하는 임재가 아니라 신비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관상을 통한 임재다.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배워온 틸덴 에드워즈(Tilden H. Edwards)가 세운 워싱턴 D.C.의 살렘 연구소는 로렌스 형제를 “자신의 관상 가운데 신이 온 세상 안에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관상은 하나님을 온 세상에서, 그리고 모든 사물을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17세기 카르멜 수도회의 탁발 수도사인 로렌스 형제는 이것을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랑스러운 응시”라고 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로렌스의 임재란 범신론적이고 뉴에이지적인 임재다. 릭 워렌은 이 임재를 ‘호흡기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임스 골은 『관상기도』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그 ‘상상’이라는 것은 로렌스 형제가 말한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골(James W. Gol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적인 기적을 포함하여 기적을 행하는 선물로 흐를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삶의 창조적인 부분인 상상력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부분적으로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묵상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은 완벽하게 적절하며 우리가 성령으로 우리의 감각을 거룩하게 하고 채우려는 우리가 하나님이 될 때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용도 중 하나이다. 이것은 뉴에이지의 상상력과 같지 않지만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제임스 골에 의하면, 로렌스 형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뉴에이지의 상상력과 동일하지 않지만, 인간의 상상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며 거의 뉴에이지 수준이다. 로렌스가 사용한 인간의 상상력이란 단순히 무엇을 상상하는 정도가 아니다.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난다(Ananda)이다. 아난다는 인도 카필라의 승려이며, 고타마 붓다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아난타(阿難陀) 또는 아난(阿難)이라고도 불린다. 아난다는 고타마 붓다의 사촌 동생이며, 의역하여 경희(慶喜)라고도 불린다. 그것을 이어받아 ‘아난다 명상’을 하는데, 그 아난다 명상의 승려인 나킨 렌티(Nakin Lenti)는 프랭크 루박에 대해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하나님 없는 외면적인 정치적 수단보다 더 선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열렬히 추종하고 따라가는 유기성 목사가 말하는 영성일기의 뿌리가 되는 프랭카 루박이 이런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영성일기’에 열광하고 있다. 

 

정현구 목사는 계속해서. ‘목사로 사는 가장 우선적인 책임이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목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내 곁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정현구 목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목회하면서 전도 심방, 상담도 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 눈뜨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학교에 임재훈련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현구 목사는 ‘제일 중요한 것이 기도인데, 기도할 때 눈을 감는다. 히브리인들은 눈을 감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현구 목사는 52분 39초부터 ‘기도에는 음성기도가 있다. 보컬기도, 조용히 기도하는 침묵기도도 있고, ‘컨텀플레이션’이라는 기도도 있다. 약간은 오해되기도 한다. 관상기도라고 번역되나 좋은 번역이 아니다. ‘동행기도’, ‘임재기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기도다.’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정현구 목사는 관상기도가인 브래넌 매닝(Brennan Manning, 1934-2013)의 『아바의 자녀』(Abbas Child)라는 책에 나오는 예화를 말하면서 노인과 신부와의 대화를 말했다. 그것도 ‘가톨릭 이야긴데’라고 말하면서, ‘로마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를 했다.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고신교단의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이렇게 설교할 수 있는가? 고신교단의 목사가 관상기도를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말하고 로마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를 당연한 듯이 말할 수 있는가? 고려신학대학원은 목사 후보생을 가르치는 곳인가? 로마 가톨릭 신부 후보생을 가르치는 곳인가? 이런 일이 개혁신학에 어긋난다고 말하면, 편협한 시각이고 좁은 관점인가? 

브래넌 매닝이 누구인가? 매닝은 로마 가톨릭의 프란시스코회 수사였다. 매닝은 관상기도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매닝은 『예수의 서명』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손을 잡음’이라는 한 장을 따로 할애하여 관상기도에 대해 말했다. 매닝은 관상기도를 무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는 것처럼 말했다. 매닝이 말하는 관상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다. 

레이 윤겐(Ray Yungen)은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사제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매닝이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손”을 잡으라고 할 때, 기독교인들이 잡고 있는 손은 머튼이 말하는 신의 손이다! 

 

머튼의 전기 작가인 윌리엄 섀년(William H. Shannon)은 “관상기도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의 떠오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머튼은 또 누구인가? 머턴의 첫 번째 책은 『관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 1948)라는 책이며, 마지막 책은 이 책을 개정한 『내적 체험』(1968)이다. 관상기도에 대한 머튼의 사상은 『내적 체험』에 농축되어 있다. 머튼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이전 관점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관상기도에 대해 말했다. 머튼은 특히 동양 종교를 연구하여 얻은 통찰들을 반영했다. 

 

예를 들면 머튼은 선불교의 사토리(satori)를 언급하며 자연 질서 안에서 거의 “임상적으로 완벽한” 내적 자아 실현의 예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토리는 “영혼의 내핵이 폭발하듯 열려서 가장 깊은 자아를 드러내는 영적 깨달음”이라고 이해합니다. 그에 비해서 기독교의 신비체험은 “내적 자아를 인식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초자연적인 믿음의 강화에 의해서 우리의 내적 자아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관상은 내적 자아의 깨어남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넘어서 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향유도, 즐거움도, 행복도, 평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최상의 사랑 그리고 해방된 영적 사랑의 활동 안에서 진리와 실재를 초월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만족이나 안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달음과 생명과 창조성과 자유입니다. 사실 관상은 사람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영적 활동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신의 아들됨을 가장 창의적으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사람이 그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아들(the Son)이 그의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깨어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나’ 안에 있는 진리(the Truth)와 신적 자유(the Divine Freedom)의 승리입니다. 그 가장 깊은 ‘나’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가 되십니다.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 안에서 말입니다.” 

 

선불교의 사토리는 좌선(zazen, 벽 응시하기)의 심리학적 결과이며, ‘새로운 방식의 자각’이다. 머튼과 선불교의 관계를 알면 관상기도가 동양의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머튼은 태국에서 열린 종교 간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불교, 힌두교 그리고 이 위대한 아시아 [신비] 전통에 열려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독교 전통의 가능성을 좀 더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얻는다고 믿습니다. 

 

머튼은 관상기도의 촉매로 삼아 동양 종교를 혼합했다. 머튼이 관상기도를 통해 얻은 통찰과 동양 종교의 통찰이 너무나 동일했기 때문이다. 

정현구 목사가 언급한 『아바의 자녀』라는 책 추천자를 보면 관상기도가인 래리 크랩(Larry Crabb),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마이클 야코넬리(Michael Yaconelli)가 나온다. 마이클 야코넬리가 누구인가? 야코넬리는 헨리 나우웬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레이 윤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우웬은 지혜와 용기를 침묵의 장소에서 발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다. 야코넬리는 나우웬의 훈계를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이 세운 조직을 통해 나우웬의 관상 기도 방법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신비론적 패러다임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미래의 기독교인은 어떤 모습일까? 기독교인들이 헨리 나우웬과 같은 영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나우웬이 그랬던 것처럼 불교도들과 함께 명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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