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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반려동물에 대한 입장
  • 편집국
  • 등록 2021-11-21 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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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려동물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반려존재에 대해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반려존재들 관련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분들, 모두에게 혼란과 갈등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평소 가진 생각들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1.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첫째, 인간성 상실에 대한 좌절감에 대한 반대현상이 그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점점 경제중심화 되면서, 지나친 경쟁사회로 인해, 삭막한 인간성에 대해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한 번 마음을 주면 배신, 변심하지 않는 반려 동물들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매여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되는 악함이 최고정점에 달하여 있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도피처 개념으로 반려동물들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반려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개인이 선택한 취미 등도 이에 못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집중시킨다. 앞으로 이와같은 문제는 여유있는 경제사정이 되어지면서, 인간이 정을 들일 수 있는 대상들은 반려동물을 넘어서서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로 발전될 것이 분명해보인다. 

 

둘째, 인간의 심리적 안정과 회복에 도움에 된다는 것이 그 한 지가지 이유일 것이다.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반려동물의 도움이 심리적 안정과 생활의 편리함 등을 해소하는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하다. 

 가령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상당히 안정을 되찾고, 그 증세가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 그 누구도 도움이 될 수 없었지만, 반려동물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위로가 된다는 깊은 애착을 갖게 되므로, 반려동물의 인간성에 대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셋째, 성경적 가치혼란과 혼동에서 비롯되는 분별력혼란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미 자연주의자들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역시 모든 존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이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는 특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조차도 가치 혼란의 소용들이 속에서 휩쓸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고 폭군처럼 행동하거나 그 권세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존재인 인간에 대해 그 사명과 책임까지도 분명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이 모든 것을 잃은 존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까지도 다 포기하신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하여 그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하는 존재이다.(롬8:18-25)

 인본중심의 사회화가 가속화되면서 이런 가치혼란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은 같은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혼동하는 경향에서, 반려동물 역시 인간과 동등한 차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취미 등 상상을 초월하는 유무형의 대상들에, 거기에 인간과 동등한 생명의 가치를 불어넣으면서, 소위 주장하는 생명평등사상들이 마치 앞선 가치관인 것처럼, 그것이 유능하고 고상한 가차관인 갓처럼 포장하여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이 진척되어 인간의 자기 확신단계로 들어가서, 이웃과 다른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독단적 가치관을 형성하여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단계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2. 반려존재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한 자세

 이미 우리사회는 반려동물, 반려식물 등 반려존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1,500여만 명이나 된다는데 대해 무관심하고 넘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또 다른 반려존재에 대해 성경적인 기준은 어떠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 이 반려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정의, 또는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목회자들 역시 성경적인 기준을 몰라서 이 점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알지만 이미 성도들이 어떤 기준없이 너무 깊이 이 반려견에 빠져 있어서, 쉽게 접근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목사에게 '반려견의 장례식을 치러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저 반려견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는 심각한 고백들을 하는 성도들이 많은 가운데, 운신하기가 쉽지 않는 것 또한 현실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반려존재에 대해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를 정의하여 보면,

 

첫째,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물로서 인간의 다스림 안에 있는 존재라는 대 원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인본주의, 물질중심주의 사상은 인간도 한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은 성경적 가치관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그 외 다른 피조물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창조하셨다. 모든 존재들을 창조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다.(창1:26-28) 그러므로 그 어떤 존재도 피조물 중에는 인간의 존재를 대신, 혹은 능가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다스림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외아들 그리스도도 인간 외에 그 어떤 존재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희생하지 않으셨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데, 그 희생이 오직 인간의 속죄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절대 간고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 역할, 영향,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존재도 인간과 동등, 또는 대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을 형상을 닮은 생기를 주셨음을 믿고 인간의 가치를 정의해야 한다.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께 최대의 불손이며 불경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왔다. 비록 그 인간의 역사가 추하고 더러워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켜 아름답게 만드는 반려식물보다 훨씬 가치없게 보일 지도 모르나, 하나님은 바로 타락한 인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꾸려왔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점 투성이의 인간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중거하는 한 가지가 될 것이다.

 그 어떤 성경에도 인간 이외의 동물의 구원이나 생명의 가치를 논한 곳이 없다. 인간에 도움이 되는 것,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것, 그것이 인간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녀가 다른 집의 자녀보다, 또는 다른 존재보다 못하다고 할 슈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악함과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 자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것의 증거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십자가가 아닌가?

 아주 미화시켜 동물도 감정이 있다, 식물도 감정이 있다, 코끼리가 동료의 죽음에 반응한다, 소가 주인의 죽음을 알고 울음을 운다 등등 수많은 증거들을 둘러대며 변호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인식의 사상은 직선적 역사관이다. 자칫 잘못 확대해석하여, 위의 반려견의 인간화를 받아들이면 타종교의 윤회사상과 맞물려 아주 복잡한 신앙이 되어질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비록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고,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결단을 내리더라도, 반드시 다시 회복하고야 마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존재는 인간외에는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반려존재는 반려존재로서 사명을 다하는 것이 사명이고, 인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특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아서다는 것은, 모든 파조물에 대해 전제군주적인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받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이 각각 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목적을 잘 이루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목적수행을 제대로 못하면 인간은 그 행위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반려존재는 반려존재로서 인간에게 위로를 주고, 사는 동안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그 자리에 있게 하면 된다. 일정한 부분 감정의 소통도 일어난다면 힘을 얻으면 된다. 또 우리의 마음을 일부 풀어준다면, 사람들에서 배신당하면서 환멸을 느꼈다면, 그래서 반려존재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면, 위로받으면 된다. 거기 그 자리에 있게 하면 반려존재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반려존재는 영광이다. 

 마치 인간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성실히 준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잘 못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 존재인 것처럼, 반려존재도 그 사명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3. 반려존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지침

1) 반려존재(동물, 식물, 그 외)는 인간의 다스림을 받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 반려존재는 인간에게 위로, 유익, 치료, 도움을 주었다고 특별한 존재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3) 반려존재는 인간과 같이 영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그 어떤 구원을 논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동안 반려를 생각해서 검소하게 매장하는 절차나, 국가의 소각절차를 따라 마무리하도록 해야 한다. 

4) 인간은 반려존재에 대해 전제폭군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돌보고, 다스리고, 그 가치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다스려야 한다. 

 반려존재를 통하여 위로나 도움을 받을 때는 상당히 애착을 갖다가, 반려존재가 병들거나 애착이 사라졌다고 버리거나 방치하는 것은 반려존재를 명명하기보다는, 도움을 받은 인간존재로서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행위이다. 

5) 수명을 다한 반려존재를 위한 그 어떤 예식, 묵념 등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장례식도 그 장례절차의 예배와 기도는 고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며, 유가족과 그가 남긴 자취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아름답게 피어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반려존재를 위해 묵념을 하는 등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무례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조상제사까지도 우상숭배의 범주에서 절대 반대했는데, 이런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6) 반려존재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인간존중과 사람사랑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에 대해 배신, 또는 피해를 입은 기억들을 가지고 반려존재들을 대하며, 점점 인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면 안 되며, 인간구원, 인간사랑, 인간구호에 대해 절대 소홀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지나친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그래서 반려존재에 대해 그리스도인 역시도 관심이 대단하다.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반려존재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현실이다. 교회도 교회내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해 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마냥 개인과 교회에 맡겨서 "그것도 모르냐?" 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반려존재에 대한 가이드라인" 이라고 하는 어떤 지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글은 필자가 평소에 마음에 담고 있는 것으로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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